수요에스라강단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7:51~60)
주님께서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스데반을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유대교인들이 모함하고 고발했습니다.
스데반이 체포되어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재판을 받은 법정은 스데반의 대 스승, 큰 어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받으셨던 유대인 최고 법정,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벌을 받게 했던 서슬 시퍼런 산헤드린입니다.
그 산헤드린의 최고수장인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심문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대제사장의 질문을 받은 스데반은 최후진술을 마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스데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스데반은 겸손했습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2)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 어른님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제 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라는 뜻으로 아주 공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겸손해야 합니다. 예의를 갖추어야 할 곳에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지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하고 경제, 사회 교육의 지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비록 종교가 다르고 심지어는 스승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사람들이었지만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보여야 할 예의를 보였고 겸손을 갖추었습니다.
두 번째, 스데반은 성경 지식에 통달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행 21:8)였습니다만 스데반은 목회자 못지않게 성경을 환히 꿰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야곱을 거쳐서 모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행 7장)
누구든 처음 신자가 되었을 때는 성경 지식이 없습니다. 당연하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기독교 신자로서, 직분자이면 더욱 직분자로서 가져야 할 성경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스데반은 상당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성경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이것저것 쓸데없이 다 끄집어 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 그리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말씀을 꼭 집어서 뽑아낼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성경을 대강 안 것이 아니라 성경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더욱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도자라면 그 순간부터 더욱 공부해야 하고 계속해야 합니다. 또 한 번 공부했다고, 또 어느 정도 공부했다고 완성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지도자들은 늘 ‘나는 모자라는 종이다, 나는 알지 못하는 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나는 무익한 종’(눅 17:10)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공부해서 제자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스데반은 집사라는 직분이 말해주듯이 전문적인 사역자는 아니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평신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사도들에 비해서 전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는 사도행전 6장 8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권세와 능력은 특별한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특별한 직분자이기만 하면 다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받을만한 사람에게’, ‘그럴만한 사람에게’ 당신의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네 번째, 스데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겸손하게 예의를 갖추었다고 해서 결코 기가 죽거나 그것 때문에 할 말을 못하거나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갖추고 겸손하면서도 해야 할 일은 더 잘했고 강해야 할 데는 그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을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옳고 바른 일, 절대적인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병든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낫게 하고 여러 가지 기사奇事를 행한 일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스데반은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면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밝혔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 말을 전적으로 거부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스데반과 유대교인들 가운데 논쟁이 붙었을 때 스데반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한 논쟁에서 넉넉하게 이겼습니다.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6:9-11)
스데반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유대교인들과의 이 논쟁에서 이긴 데에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자기의 실력이나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6:10)
‘나는’ 똑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잘 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신자의 이김, 승리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스데반은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최후변론의 시간을 자기를 위한 변론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이 한 번밖에 없는 최후변론의 기회를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변론의 기회로 삼았다는 이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나에게는 주님이 먼저다, 교회가 먼저’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힘이 들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고 자기 명예, 자기 체면이 손상될 것 같으면, 더욱 자기 목숨이 관계되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던 주님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나만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참으로 자기 생명이 걸린 그 순간에 자기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생각했습니다. 긴 변론을 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해명은 한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만 말했습니다.
여섯 번째, 스데반은 모든 면에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으셨듯 스데반은 돌에 맞아 몸이 으깨어져서 비참하게 죽는 것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죽는 마지막 모습 또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바보같이 죽는 것도, 바보같이 용서하는 것도 스데반은 스승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
[생각해 봅시다]
1. 스데반은 목숨 앞에서도 예수님이 먼저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먼저"라고 고백하지만, 막상 자녀와 가족, 돈과 건강 문제가 먼저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다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기위해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2. 스데반은 겸손하면서도 옳은 일 앞에서는 담대했습니다. 가정이나 구역 안에서 체면이나 눈치 때문에 말 못하거나, 반대로 내가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여 관계가 상한 적은 없었나요? 겸손함과 담대함,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추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3. 스데반은 바보같이 죽고 바보같이 용서하며 스승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습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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