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초대
하나님이 높이시는 인생
마 23:1-12절
복음을 믿고 확신하는 우리는 기독교가 진짜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기독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합니다.
최근 수년째 한국교회가 사회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신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 기독교 기관의 설문에 따르면 ‘교회를 신뢰하는가? 목사와 기독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가는가?’하는 질문에 10명 중 7명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교회는 그동안 세상의 소금이 되고자 노력했는데, ‘소금’은 커녕 세상은 오히려 기독교인들 때문에 힘들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려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맛을 잃어버리니 아무쓸데 없어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신앙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세상에서 점점 더 버림받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3-7절을 다시 읽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나타내는 ‘그들’이라는 단어 대신 ‘기독교인’을 넣어서 읽으면 예수님의 답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기독교인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절 기독교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절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위 말씀에 ‘기독교’인을 넣어서 읽어도 전혀 본문이 어색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모습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크게 4가지로 지적하십니다. 첫 번째는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옳은 말을 할 줄은 알았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헐벗고 양식이 없는 형제자매에게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은 해도 그들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네 번째, 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높은 곳에 앉기를 좋아했고, 랍비, 아비, 지도자라 칭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 말라, 참된 스승은 오직 그리스도니 너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라.”
예수님은 그들의 언행불일치, 무관심, 사람들을 의식하고, 칭찬듣기 좋아했던 모든 외식적인 신앙의 이유를 12절 말씀으로 요약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특별히 주목해서 볼 단어는 ‘낮아지리라, 높아지리라’ 라는 단어의 문법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적 수동태로 쓰여 있는데, ‘미래 어느 시점에,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언젠가 반드시 그를 낮추실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그를 높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가 낮아지게 되었을까? 하나님이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낮추셨을까? 기독교가 높아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예수님을 통해서 더 높아지려했고, 재물을 더 쌓으려고만 했고, 성공에만 집착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 정치와 재물과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교회를 낮추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만 중요했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을지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시대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매우 곤궁했습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이 감당해야할 세금은 종교세는 물론이고, 토지세, 직접세, 간접세와 강제부역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떼고 나면 남는게 없었습니다.
왜 성경에는 그렇게도 많은 환자와 귀신들린 자들이 등장할까요? 한번 전쟁이나면 남자들은 끌려가 죽고 과부들은 넘쳐나게 됩니다. 홀로된 여인의 몸으로 가정을 지키고 생계를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불량배나 로마군인들에 의해 여인들이 겁탈당하고, 심지어 팔려가면 남는 것은 고아들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영양실조는 질병으로 이어지고, 이런 저런 폭력과 전쟁의 끔찍한 고통가운데서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참 많았었습니다.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개인의 힘으로 어쩔수 없는 시대가 낳은 비극이자 아픔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하나님이셨는데, 그마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만든 지키지도 못할 율법조항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목자없는 양과 같이 의지할 곳 없어 기진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는데,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이용해 온갖 특권은 다 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저주와 화를 선포하신것입니다.
비단 종교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재정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입법부인 국회의원이고, 이들이 율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으니 사법부인 판, 검사들이고, 이들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전달했으니 행정부입니다. 종교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책임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이십니다. “화있을 진저 사회 지도자들이여...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종교인들이여...
화있을 진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는 너희들이여...”
만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람들은 빈곤과 어려움과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찾고자 하는데, 우리의 행이 그 길을 막고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관심이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고, 개인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가 바로 서기관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며칠 전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화로에 모시고 관망실에 앉아있는데 유가족 중에 한 분이 제게 말을 거셨습니다. 60은 훨씬 넘으신 남자분이셨습니다. “목사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삶의 이유를 모르겠고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하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단지 고인에 대한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직업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진짜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분께 ‘예수 믿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말 따위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분들에게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바로 복음,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삶의 진정한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회복됩니다. 그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이유이자 목적입니다.
수년전에 기독교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고지론’이라는 단어입니다. ‘고지’를 점령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기성세대가 ‘기복신앙’에 빠져 있었을 때, 젊은이들은 고지론에 열광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해라, 유명해져라. 그러면 전도를 해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우리가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데 예수 믿으라고 말하면 ‘너나 믿으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세상에서 높은 곳에 올라 복음전하자”는 내용입니다. 언뜻 들으면 묘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그런 설교를 하시니 많은 청년들의 가슴은 뛰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도 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시면 잘 감당해야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지’가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있느냐?입니다. 그 신앙의 논리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저런 복을 받는구나..’하고 설령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일 될까요? 그들은 십자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죄의 본성과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빚어지는 ‘새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비추는 빛과 소금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렬할지는 보지 못하고, 2,000년 전에 예수님을 통해 한자리 얻고자 했던 실패했던 제자들의 뒤를 똑같이 따라갈 것입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또다시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팔고, 곤란한 순간이 찾아오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수님의 길과 나의 길이 전혀 다름을 알게 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못박는 폭도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성공으로 영혼이 변화되고 복음이 전파된다면 굳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하사지만 복음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따르는 자들’, ‘예수님을 통해 성공과 출세의 길로만 가고자 하는 자들’은 낮추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속에 예수님으로 참된 인격으로 만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며, ‘섬기는 삶과 낮아지는 삶을 사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를 높여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한국초대교회사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성경이 들어왔을 때 한글로 번역이 되어서 들어옵니다. 당시에 한글은 천한 글로 여겨졌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힘없고 천대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어두워 앞이 캄캄했던 한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갑니다.
구한말 당시 독립신문 기사를 보면 이렇게 기독교를 소개합니다. “세상에 교가 많이 있으되 예수교같이 참 착하고 참 사랑하고 참 남을 불쌍히 여기는 교는 세계에 다시없는지라” 그들은 예수를 성공과 출세를 보장하는 이유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당장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삶에서 도박, 음주, 첩, 거짓말과 같은 죄의 문제들이 떠나가고 삶이 변화되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 타락하고 캄캄한 시대 속에 실낱같은 비추며, 한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켜갔습니다.
인사동에 위치한 승동교회 역사에 재미있는 한국초대교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씨조선의 왕손으로 승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이재형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종보다 늦게태어난 탓에 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1905년 왜인들이 득세하고 일본이 강제로 불법적인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보고울분을 참지 못하고, “나는 왕손의 모든 특혜를 깨끗이 포기한다.”선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민이 됩니다. 그는 그렇게 평민이 되어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마부였던 엄귀현을 만나게 됩니다.
엄귀현은 훗날 경동제일교회의 영수가 되는데, 영수는 초대교회 직분으로 교회 종치는 일, 행정, 청소, 심지어 설교자가 없으면 설교까지 하는 귀한 봉사직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천한 마부였지만 한결같은 성실한 모습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모습을 본 담임목사가 마부였음에도 그를 교회영수로 세운 것입니다.
엄귀현은 이재형대감을 아주 극진히 섬겼습니다. 이재형대감은 이런 그가 하도 대견하여 그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대감이 말을 부치자 그때 엄귀현은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나리, 황송하오나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소서. 그래야 나리도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사옵니다.”
이재형대감은 마부꾼의 태도가 건방지고 괘씸하여 “건방진 소리 하지말고 말이나 잘 몰거라. 예수를 믿으면 마부꾼 신세라도 면할 수 있단 말이냐?”하고 그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때 마부꾼 엄귀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리, 예수를 믿는 것은 그런 도리가 아닙니다. 저는 마부꾼신세를 면하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꾼 노릇을 더 잘하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이것이 초대 한국교회 성도들,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고 무식했던 성도들이 예수를 믿었던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공과 기득권으로 올라가고자 함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기 위하여... 유명해지고 높이 오르진 못해도, 적어도 내가 사는 공간에는 하나님나라의 향기라도 날수 있게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높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성도들을 통해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이재형 대감은 예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승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그는 평생을 무보수로 목회하면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어주고 유능한 젊은이들을 유학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렇게 섬기다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부 엄귀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후에 경동제일교회의 영수가 되었지만 끝까지 마부로 살아갑니다. 그 후 1·4후퇴 당시 평택까지 내려갔다가 “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오르고 내리던 길에 시체가 보이면 국군이건 인민군이건 보이는 대로 묻어주고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도 폭격에 맞아 안타깝게 그 자리에서 죽게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빛과 소금과도 같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캄캄한 인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마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와 목적이었습니다. 130년 전에 기독교인이 한명도 없던 시절 한국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를 믿어 높아지고 출세한 것을 자랑삼아 “여러분들도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전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 없는 유사종교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체질을 변화시킵니다. 죄의 본성상 남을 섬길 수 없는 우리가 남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고, 출세와 돈과 성공이 아니고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우리를 예수님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이 높아지는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섬김받기 위해 스스로 힘을 쓰며 올라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내가 낮출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내가 높이리라”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첨부 파일 |
---|---|---|---|---|---|
91 | 인생을 바꾸는 말의 힘 (야고보서 3:1-12) | 관리자 | 2025-03-09 | 6 | |
90 | 기도를 부탁하세요 (사도행전 12:1-12) | 관리자 | 2025-03-09 | 8 | |
89 |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새해 (야고보서 4:13-17) | 관리자 | 2025-01-03 | 65 | |
88 | 사랑하면 해결됩니다. (요한일서 4:7-12) | 관리자 | 2024-12-01 | 49 | |
87 | 결정하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열왕기하 6:14-19) | 관리자 | 2024-11-03 | 57 | |
86 | 감사를 온전히 이루라 (레위기 7:15-18) | 관리자 | 2024-10-08 | 58 | |
85 | 하나님이 높이시는 인생 (마태복음 23:1-12) | 관리자 | 2024-09-19 | 66 | |
84 | 고난의 때에 구해야 할 지혜 (야고보서 1:1-8) | 관리자 | 2024-09-19 | 53 | |
83 | ‘하나님의 도우심의 시작’(마가복음 1:29-35) | 관리자 | 2024-09-19 | 55 | |
82 | 염려하지 말라 (누가복음 12:22-28) | 관리자 | 2024-06-07 | 91 | |
81 |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1-3) | 관리자 | 2024-06-07 | 77 | |
80 | 좋은 사람을 만나는 축복 (창세기 24:1-9) | 관리자 | 2024-04-10 | 105 | |
79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시편 137:1-9) | 관리자 | 2024-03-06 | 93 | |
78 | “현재를 살아가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마태복음 24:36-44) | 관리자 | 2024-03-06 | 98 | |
77 | ‘새해를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 (창세기 23:1-13) | 관리자 | 2024-01-05 | 1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