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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사람을 만나는 축복 (창세기 24:1-9)
    2024-04-10 10:41:08
    관리자
    조회수   106

     

     

    좋은 사람을 만나는 축복

     

    창세기 24:1-9

     

     

    함석헌선생님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제발, 살아다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찬성보다는

    '아니오'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또 얼마나 행복할까요? 인생에서 만남의 축복만큼 귀한 복도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는지에 따라 인생은 정말 크게 달라집니다. 과거 유명했던 탈옥수 신창원은 만일 초등학교 때 자기를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선생님이 한 분이라도 계셨다면 자신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친구, 좋은 교사, 좋은 배우자 등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고,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도 삶도 변화시킵니다. 좋은 만남의 복은 인생에서 매우 큰 축복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정말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을 받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고, 물질의 축복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민족과 나라가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 중에 귀한 복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좋은 사람을 만나는 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종이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종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를 상속자로 생각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재산을 상속할 때는 직계 가족이나, 자손이 없는 경우 가까운 친척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조카가 상속의 대상이었을 텐데,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지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에셀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주인인 아브라함을 온전히 신뢰하고, 충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배필을 찾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땅은 가나안땅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지역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 땅에 가서 이삭의 배필을 찾고자 했습니다. 원래는 직접 가서 며느리감을 찾아야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일을 엘리에셀에게 맡깁니다. 며느리를 택하는 것은 가문의 미래를 결정할 만큼 정말 중요한 일인데, 그 일을 종에게 맡긴 것입니다.

     

    이 중요한 일을 종에게 맡긴 아브라함도 대단하지만, 그 일을 하겠다고 순종했던 엘리에셀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정말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있는 가나안땅에서부터 고향 땅 하란까지의 거리는 대략 800km의 엄청난 거리입니다. 한 달을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안내해줄 사람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엘리에셀에게는 여러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자인지 어떻게 알겠으며, 또 그 여인이 따라오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고향 땅에서 신부감을 찾는 것은 정말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다를 바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에셀은 주인의 말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준비해 주실 것이다.”는 말만했는데,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그 말 한마디에 충성합니다. 주인의 뜻에 충성하고, 또한 주인이 믿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런 먼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의 일이 정말 순탄하게 풀립니다. 엘리에셀은 하란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 주인의 하나님, 원하건대 나를 순탄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인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참 겸손한 기도입니다. 주인을 위한 진실된 마음이 참 귀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그런 진심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가 기도한 대로 모든 일들을 순조롭게 인도해주십니다. 그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삭의 배필감을 만날 수 있었고, 그녀를 데리고 주인이 있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엘리에셀은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만한 사람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종의 신분이지만 가족보다 더 믿을만한 사람, 자신의 전 재산을 물려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 정말 중요한 일을 믿고 맡길 만큼 믿음이 가는 사람, 엘리에셀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는 인생은 얼마나 든든할까요?

     

    누구든 힘든 인생을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잠언의 말씀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인생의 많은 어려움들과 문제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혼자 모든 일들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곁에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만남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함께 마음의 진심을 나눌 수 있고, 믿어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엘리에셀 같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고 복된 인생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마을의 어느 집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계셨을 때 일입니다. 이미 그 집 안팎으로는 수많은 무리가 모여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거동하기조차 힘든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낫고 싶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곁에는 그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입추의 여지도 없는 상황속에서 친구들은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바로 지붕을 뚫어 자신의 친구를 침상째 예수님께 내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황당한 방법입니다. 자신의 집도 아닌 남의 집 지붕을 뚫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례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침상째 메고 지붕에 올라가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병든 자신의 친구를 위해 그런 모든 수고를 감내합니다. 지붕을 배상해야 하는 금전적 손해도, 육체적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마음은 오직 하나 우리 친구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았으면 좋겠다. 우리 친구가 나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는 지금뿐이다.’ 예수님은 그 친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중풍병자에게 있어서 이 친구들은 인생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이런 친구를 옆에 둔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이제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엘리에셀 같은 종, 이런 침상을 달아 내려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런 친구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저절로 옆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만들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친구는 자신의 얼굴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친구가 곧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대변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리에셀의 그 충성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주인의 말만 믿고 그런 충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모시는 아브라함이 먼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뭐라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당시 부족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말씀도 안 해주십니다. 그냥 무작정 하나님을 믿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간단하게 서술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라함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플랜 B를 하나님께 제시해주시면 떠나겠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분을 신뢰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그게 순종입니다. 이해가 되어서 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니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순종의 모습과 그리고 순종의 결과가 무엇인지 옆에서 가장 똑똑하게 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도 닮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인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우리 주인님의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말씀을 따라 그 종도 주인의 말씀을 따라 떠난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삶을 성경에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가 건강했을 때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그런 존재였을 것입니다. “, 웬만하면 도와주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안 되겠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도와줄게그렇게 적당히 생각해주는 척하고, 적당히 도와주는 시늉만 했던 친구가 아니라, 정말 할 수 있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친구를 도와주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친구였기에 그가 중풍병으로 힘들어할 때 그의 친구들도 그를 위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그를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먼저 살아가는 사람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곁에도 엘리에셀 같은 친구, 침상을 들어준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항상 적당히 시늉만 하고 흉내만 내는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 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조금 말씀대로 살아보다가 하나님,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남들은 이렇게 안 살아요. 불편해요.”하며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어느 정도 흉내만 내다가 힘들고, 손해 볼 것 같으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의 이유를 수없이 댑니다. ‘지금은 바빠요, 제가 보기에는 이게 더 옳아요, 힘들어요, 그렇게 살면 손해봐요..’

    그러나 정말 무엇이 더 손해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약간의 수고, 물질적 이익과 편안한 삶을 잃어버리는 게 손해인지, 아니면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게 손해인지? 세상의 비위를 맞추고 세상 친구들을 곁에두는 게 이익인지? 하나님을 친구로 곁에 두는 게 이익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아마 하나님도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분명 그럴 것입니다. “저 녀석이 이것만 좀만 더하면 더 좋은 것을 맡길 텐데... 나를 좀 더 신뢰한다면 내가 줄 것이 더 많은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우리가 하나님께 엘리에셀과 같은 사람, 침상을 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시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그 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온 세상이 다 찬성해도 고개를 흔들 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에 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최선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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