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에스라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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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8:18~22
예수님께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실 때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자기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셔서 깨끗하게 나은 기적이 그 나병 환자에게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일에 우리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병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때 한 말 중 ‘주여 원하시면’(2절) 이라는 말입니다. 이 나병 환자는 부탁의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았습니다. ‘주여, 내가 이렇게 힘듭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바랍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고 초점을 주님께 맞추었습니다. 그 환자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치료하실 때 쓰신 말씀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3절)
나병 환자가 말한 표현 그대로를 쓰셨습니다. 나병 환자의 그 표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관심을 가질 것은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료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3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나병 환자에게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대하실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거부하는데 예수님마저도 자기를 거부하지는 않으실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거부하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기 몸에 손까지 대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많이 놀랐습니다. 크게 감격했습니다. 감격이 넘쳤습니다.
나병 환자의 무서운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의 감격은 그 무서운 나병이 나았다는 것보다 아무도 자기를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그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인 자기 몸에 손을 대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는 나병이 나아도 앞으로 헤쳐나갈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감격에는 어떠한 문제도 있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 감격은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입니다. 나병이 나았다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이 완전한 구원은 아닙니다. 사업이 망했다 다시 재기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문제가 다 풀렸다는 것, 죽을병에서 회복되었다는 것 모두 대단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로는 진정한 구원이 안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정말 알게 되었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아무리 환경이 안 좋아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신 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4절)는 당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일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의외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에게 점령을 당한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짓밟히는 삶을 살아왔고 수탈당하고 갖은 어려움을 다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속히 위대한 영웅,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속히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해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줄 것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조금이라도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열광했습니다. 또 유대민족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상당한 반골 기질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로마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민족이 유대민족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무자비하게 진압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천형인 나병 환자, 절대로 낫지 아니하는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치료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몰려들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원자라고 생각하고 궐기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 결과는 당연하게 로마의 무자비한 탄압을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함구 당부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먼저 백성들을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당신 때문에 그나마 누리고 있는 평화가 깨질까 봐, 혹시라도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까 봐 금지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기독교인들이 닮아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이 예수님께 백부장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백부장은 모든 유대인들이 경원하는 로마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백부장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의외다 싶을 정도로 아주 좋게 대하십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부탁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라고 흔쾌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로마사람, 모든 유대인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로마 백부장을 이렇게 환대하실까요? 그 이유가 백부장이 예수님께 한 말 가운데 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9절)
백부장의 말이 아주 특별합니다. 백부장은 당시 세계 최강 로마제국이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로마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백부장들은 그야말로 못할 것이 없는 권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당시 젊은 무명의 랍비 예수님을 찾아온 것 자체부터 특별합니다. 찾아온 이유도 당시에는 하나의 ‘물건’으로 여겨지던 하인,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으니 더 특별합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는 더욱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저 위에 있고 자기는 저 아래에 있어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자리에 있는 분으로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나이지만 그러나 저 예수님은 내까짓것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할 귀한 분, 감히 내 집으로 모시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귀한 분’이라고 여깁니다. 또 예수님을 무엇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으로 완전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분은 그런 일을 위해서 직접 오시거나 가실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말씀으로만 해주셔도 얼마든지 가능하신 분이라는 표현이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이 백부장을 예수님께서 정말로 대단하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
지나칠 정도로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들을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과할 정도로 칭찬하시는 말씀은 물론 백부장이 그 대상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대상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방인인 로마사람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너희 이스라엘은, 너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이미 맡아놓은 당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복,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아마 조금 쉬고 싶어서 들어가셨지만 또 쉬지 못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아누워있어서 고쳐주셨고 그러자 또 다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러했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어떤 삶이어야 되겠는가?’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실 때 손을 내밀어 대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 삶에서 예수님의 '손 내밀기'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2. 백부장은 로마의 장교였지만 예수님께 겸손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떻게 겸손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교만하게 행동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고,어떻게 겸손을 회복할 수 있을지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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