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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8)-마태복음 8: 18~22
    2014-11-26 15:15:28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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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8)







    마태복음 8: 18~22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 앞에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가시는 중에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병을 치료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병환자를 치료해주셔서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병을 치료해주셨는데 이 치료에 대해서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병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때 한 말 중 ‘주여 원하시면’(2절) 이라는 말입니다. 이 나병환자는 부탁의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았습니다. ‘주여, 내가 이렇게 힘듭니다. 내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이렇게 간절하게 주님께 바랍니다.’ 가 아니라 ‘주여, 당신이 원하시면, 당신이 바라시면, 당신이 낫게 하신다면’ 이라고 하나님께 맞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요청에 대하여 대답하실 때 ‘내가 원하노니’(3절) 라고 나병환자가 말한 그대로를 쓰신 것을 보니 나병환자의 이 표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때 이 표현이 좋으셨다면 지금도 이 표현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우리야 급하고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 제가 이렇게 힘듭니다. 제 정성을 생각해서, 제 간절한 마음을 생각해서 어떻게든 응답해주십시오.’ 라고 요구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와 달랐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세례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셨는데 우리도 주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을 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 관심을 가질 것은 나병환자가 부탁했을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3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영화 벤허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의 명화입니다. 벤허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무렵에 나병환자인 자기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병이 심합니다. 여동생은 이미 죽을 때가 다 되었고 온몸이 다 일그러졌습니다. 몸을 감싸고 있으니 보이지 않지만 얼굴은 형편이 없습니다. 벤허가 그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오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게 되고 그들이 나병환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벤허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고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돌멩이를 들어서 다 던지고 도망갑니다. 혹시라도 전염될까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일 바로 전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오면서 장님 거지 한 사람을 만납니다. 보지 못하는 거지는 벤허에게 적선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벤허가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장님 거지 바구니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다 사람들이 문둥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랍니다. 보지 못하니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자기에게 동전을 준 사람이 나병환자이거나 혹은 그 환자의 가족인 것을 알고 지금까지 받았던 동냥동전을 전부다 땅에 쏟아부어버립니다.



    이런 나병환자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까지 왔는지 참 용합니다. 이 나병환자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를 거부하는데 예수님마저도 나를 거부하면 어떻게 할지 두렵고 떨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예수님을 통해서 내 병이 나을까 하는 마음에서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이 분마저도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쯤이었으니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시골에 갔다가 옛날 집 마루 옆에 있는 조그마한 댓돌 곁에 어떤 사람이 거적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집 가장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귀하게 치료했겠지만 오래 있다 보니 전염될 것이 두려워 집안에 못살게 하고 쫓아내어 방 앞에 그렇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이야 강아지 음식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때 강아지들은 사람들이 먹다 남은 것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먹는 음식도 강아지와 똑같이 식구들이 먹고 난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집의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인데도 그걸 받아서 강아지처럼 먹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버리므로 절망에 빠져 있었던 그 사람은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그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저주받은 자기 몸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크게 감격합니다. 그야말로 죽도록 감격했습니다. 나병환자는 무서운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의 감격은 그 무서운 나병이 나았다는 것보다는 아무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께서 내 몸에 손을 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감동이 훨씬 더 컸습니다. 나병환자는 지금 나병이 나아도 남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렸는데 이제 내 병이 나았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받아줄까, 내 가족들은 나를 받아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는 나병에 걸렸으니 죽으면 죽겠다는 맘으로 짐승처럼 살아왔으므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병이 다 나았으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할지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 받은 감격은 그런 문제가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입니다. 병이 나았다는 것은 잠시 기분은 좋겠지만 그것이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이 망했다 다시 일어섰으니 좋은 일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모든 문제가 다 풀렸다는 것은 아주 마음은 좋지만 이것은 진정한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으니 하나님께서도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위대하신 예수님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만약 꼭 필요하다면 그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께서 나를 선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체험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환경이 안 좋아도 당당하고 멋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어도 이런 구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 사람은 정말로 부끄럽고 추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바라기는 이런 구원을 여러분의 구원으로 받을 수 있기 바랍니다.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후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4절) 라고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일을 알려야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의외입니다. 혹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간증하고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인 것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낫게 해주셨고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오면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야할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금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다른 민족에게 점령을 당한 피지배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짓밟히는 삶을 살아왔고 수탈당하고 갖은 어려움을 다 당한 이스라엘 민족들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속히 위대한 영웅,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도자가 자기네들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건져줄 것을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조금이라도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몰리고 따라다녔습니다. 또 유대민족들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반골기질이 있습니다. 반골민족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늘 이러했기 때문에 로마제국은 대제국의 어마어마한 많은 민족들이 있었지만 가장 경계하는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무자비하게 진압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천벌을 받은 병인 나병환자, 절대로 낫지 아니하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료했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렇게 하신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저 사람이야말로 수백 년간 우리 민족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궐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결과는 당연하게 로마의 무자비한 탄압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보다 먼저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먼저 평화를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당신 때문에 평화를 깨뜨릴까봐, 혹시라도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까봐 그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기독교인들이 지향해야할 삶의 모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중에서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생각하는 평안을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나병환자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4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법입니다. 율법은 나병환자가 다 낫게 될 경우에 제사장이 이것을 확인해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찾아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고 예물을 들고 찾아가서 다 나았다는 확인을 해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는 여기에 대한 규정이 있습니다. 규정에 따라 다 나은 것인지 아직 더 나았는지 확인하고 난 후 나았으면 완치증명서를 떼어줍니다. 나병환자는 이 증명서를 들고 사람들에게 다 나았다는 자기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께 백부장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니이다’



    백부장은 모든 유대인들이 경원하는 로마사람입니다. 게다가 권력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완장을 찬 사람들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두 백부장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주님까지 그냥 싫어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을 특별히 잘 대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백부장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의외다 싶을 정도로 아주 좋게 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부탁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 라고 아주 흔쾌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로마사람, 모든 유대인들이 별로 안 좋아하는 백부장을 이렇게 환대하실까요? 항상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무언가 까닭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아가시면서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을 때 그저 내 생각만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방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런 여유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긍휼의 마음이고 기도교인들이 가질 마음입니다.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백부장이 예수님께 한 말 가운데는 오늘날 우리가 보아도 특별함이 있습니다.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9절)라고 대답했습니다. 특별합니다. 정말로 대단합니다.







    백부장은 당시 세계 최강 로마 제국이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로마 최고의 엘리트입니다. 로마제국은 이 최고의 로마 엘리트들에게 무소불위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정말로 큰 잘못만 아니라면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아량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당시 백부장들은 못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의 권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백부장이 당시 젊은 무명의 랍비 예수님을 찾아온 것 자체부터 특별합니다. 찾아온 이유도 당시에는 하나의 물건으로만 여겨지던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으니 얼마나 특별합니까? 그런 백부장이 예수님을 대하는 자세는 더 특별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저 위에 있고 자기는 저 아래에 있어서 자기로서는 도저히 가까이 하지 못하고 감히 범치 못할 자리에 있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를 상당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절) 저 예수님만큼은 내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할 귀한분이다, 나는 그분에 비하면 정말 천한 사람, 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자기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아주 귀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내 집에 오신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무엇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으로 완정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오실 필요 없고 그저 말씀만 해주시면 된다는 표현이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이 백부장을 예수님께서 정말로 대단하게 칭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 라고 지나칠 정도로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에도 까닭이 있습니다.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지나칠 정도로 칭찬하시는 것은 물론 백부장이 그 대상이지만 사실 그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방인인 로마사람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너희 이스라엘은, 너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가?’ 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특별한 사람들이 이미 맡아놓은 당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든지 그 시간에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이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에게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라는 11절-1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복,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받을 수 있을만한 사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그 시각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있었습니다. 아마도 황달 혹은 말라리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해주셔서 장모가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되자 곧바로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본문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라는 14절과 15절 말씀입니다. 이 모습이 참 좋습니다. 병 다 낫고 건강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크기는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다, 어떤 복을 받았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은 복의 크기, 은혜의 크기는 은혜를 받고 난 후 어떻게 사는지 그때서야 그 크기가 정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가 베드로의 장모 병을 고쳐주셨지만 주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이유를 본문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조금 쉬고 싶으셔서 들어가셨지만 또 쉬지 못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앓아누워있으니 사랑하는 제자의 장모이므로 당연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16절).. 여기서 귀신들린 자란 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좀 쉬어야할 때 또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삶이 이러했다면, 예수님께서 늘 이렇게 사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어떤 삶이어야 되겠는가? 이 질문을 합니다. 제자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서 그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진정한 제자란, 제자도란 어떤 것인가? 어떤 사람들이 진정한 제자인가를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19절)라고 서기관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에게 가시면 나도,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에게 가시면 나도,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가시면 나도 거기까지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디까지 가야하는가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 라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여기가지 따라갈 작정을 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입니다.







    또 다른 제자가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1절)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22절)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의 말씀을 보면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제자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말뜻은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신데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부터 제가 선생님을 따르겠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하는 사람들, 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감동을 주셨든지 감동을 주셨을 때 즉각적으로 결단하고 즉각적으로 시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신다면 즉각적으로 따르십시오.. 선교를 해라, 혹은 찬양대를 해라, 혹은 교회학교 교사를 해라, 또 다른 일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감동을 주신다면 즉각적으로 마음에 결단을 하시고 즉각적으로 따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의 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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