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메일
빌레몬서 (빌레몬서 1: 1~14)
2013-12-13 15:36:28
관리자
조회수 2053
빌레몬서
빌레몬서 1: 1~14 ═════════════════════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교인들은 이번에 오시는 목사님의 설교가 궁금했습니다. 첫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가 좋았습니다. 교우들은 다음 주 설교를 기대했습니다.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상하게도 지난 주 설교를 그대로 똑같이 했습니다. 교인들은 무슨 까닭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그 다음 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똑같은 설교를 계속해서 되풀이했습니다. 교인들이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내 설교를 듣고 다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좋아하기만 할 뿐 변화가 없습니다. 설교를 들었으면 변화가 있어야하는데 변화가 없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변화가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앞으로 두 주 동안 두어 달 전에 했던 설교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젊은이가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참으로 예쁜 젊은이였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 라고 그 젊은이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이 오네시모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인데 그것도 주인에게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그 손실더미를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도망친 노예가 지금 바울 옆에서 바울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민했습니다. 도망 나온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당시 로마법으로는 큰 죄였습니다. 또 남의 노예를 주인 허가 없이 데리고 있다는 자체가 큰 잘못인 것입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에게는 상당한 재산이었는데 남의 재산을 주인의 동의 없이 몰래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숨겨주는 이것 때문에 오네시모가 체포되면 처참하게 처형될 수 있습니다. 당시 법에 따르면 도망친 노예는 최악의 경우에 십자가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바울이 고민 고민하다 오네시모의 주인과 직접 해결해야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오네시모의 주인이 자기가 옛날에 복음을 전해준 빌레몬이라는 제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쓰게 된 것이고 이 편지는 ‘빌레몬서’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2절에 압비아 그리고 아킵보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아들로 빌레몬의 가족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설명할 때 수식어가 있습니다. ‘압비아’ 앞에는 ‘자매’라는 말이 있고 ‘아킵보’ 앞에는 ‘우리와 함께 병사된’ 이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자매’라는 말은 교회의 일꾼이라는 말이고 ‘우리와 함께 병사된’ 이라는 말은 충성된 기독교인이라는 말입니다.
1절 마지막부터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1-2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의 가족 이 세 사람은 다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이고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특히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의 예배당으로 제공했습니다. 당시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한다는 말은 한 두 시간 예배드리는 장소로만 제공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살기 어려웠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도 자기 돈으로 식사를 준비해오지 못했고 자기 능력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노예도 있었고 아주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 나그네들도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한다는 말은 예배드릴 공간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제공해야했습니다.
이 빌레몬을 생각하면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라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빌레몬은 그 어려운 일, 참으로 힘든 일, 정말로 귀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 빌레몬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돈 벌어서 내 한 입, 기껏해야 내 주변의 몇 몇밖에 안 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그 사람들을 웃게 하고 한 평생 노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노래하게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인생을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 말씀에 ‘은쟁반에 금구슬’, ‘은쟁반에 금사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왕 이 세상 한 평생 살아가면서 돈이 많든 적든 간에 은쟁반에 금구슬, 금사과 같은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세월 다 지나갑니다. 많든 적든 가진 것 다 두고 갑니다. 그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빌레몬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또 나중에 주님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너야말로 은쟁반에 금구슬, 금사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꼭 부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쟁반에 금구슬을 올려 놓은 사람, 은쟁반에 금사과를 올려놓은 것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복이고 여러분들에게 행복입니다. 여기서 부자라는 정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부자란 돈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자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일에 많은 돈을 쓰는 사람이라고 교회 밖에서도 이미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4절) 라고 자기가 기도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빌레몬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종은 별 것 아닙니다. 여러분 보기에도 그렇고 하나님의 종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더욱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에 의해서 기도드려지는 사람은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말씀이 아니라 우리 주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대단한 사람이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섬기라고 천사를 보내십니다. 여러분을 섬기는 천사는 하나님을 만나서 여러분들에 관해서 보고합니다.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귀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귀한 사람이며 여러분에게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있으면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 그런 기도에 응답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천사들은 하나님께 ‘하나님, 이 사람의 기도는 들으셔야합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들으셔야합니다. 이 사람을 거부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거부할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의 중보를 들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천사라는 하나님의 종들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당신의 종을 보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천사의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의 말, 기도도 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잘났든 못났든, 크든 작든 간에 그 종들의 기도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빌레몬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 바울의 특별한 기도를 받는 까닭을 성경은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 번째, 빌레몬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은 정말로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고 더 서둘러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여러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힘을 쓰고 노력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때로 계산적일 수 있고 또 때로는 일시적이고 잠시로 그칠 수 있겠지만 여러분 속에 오신 예수님께서 힘 있게 역사하시게 되면 여러분들의 그 사랑은 잠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이해타산 없이 계산 없이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힘있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6절은 빌레몬이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6절 맨 처음 ‘네 믿음의 교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빌레몬이 믿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잘했다는 말씀입니다. 빌레몬은 이 일을 잘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절약하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선하고 귀한 일을 하게 되면 도움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먼저 여러분이 행복합니다. 그 사람도 복을 받겠지만 여러분이 더 큰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돈이 많든 적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것은 여러분에게 돈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만 시늉하면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주 여러분들에게 더 복을 주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자칫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절 중반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레몬은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 얼굴,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선, 하나님의 선, 교회의 선을 드러냈다고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 천사든지 사람 종이든지 간에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서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쁜 사람으로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각별하게 더 귀한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들, 천사들은 더욱 더 각별하게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천사들로부터 또 이 땅의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중보기도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매일 빌레몬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빌레몬의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6절 마지막에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레몬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이 빌레몬의 귀한 일을 통해서 교회란 이런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런 분이구나, 그 하나님을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세상 사람들, 교회에 갓 들어온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도 저 사람이 섬기는, 저 사람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빌레몬은 교회를 평안하게 했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7절)
세상은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삭막하고 어렵습니다.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재미가 없습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에게 빌레몬처럼 위로를 준다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한 평생 지나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제쳐두고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았다,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라고 틀림없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눈으로 똑똑하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진짜 곡식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참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곡식은 평안하게 합니다.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이웃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가정을 평안하게 하고 교회를 평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반대입니다. 주변의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힘들게 만들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7절에서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종이 빌레몬 때문에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잘 먹고 잘 살고 여러분의 후원을 받았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일을 하고 선하게 살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실 때 하나님의 종들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이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받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겁겠습니까? 이 일을 보아도 저 일을 보아도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선한 사람들은 점점 더 밀려나가고, 있는 것까지 빼앗겨 빈자로 가고, 빈자는 극빈자로 밀려가는 이런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우신지 모릅니다. 그런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힘을 얻고 기쁨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그 기쁨과 위로의 몇 십 배, 몇 백배를 더해주십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더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귀한 일을 더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부탁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불법적으로 와 있는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는 말을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2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무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오네시모가 지금까지는 불법적으로 와 있었기 때문에 돌려보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오네시모를 다시 돌려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바울에게 특별한 표현이 몇 개있습니다. 먼저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라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자 빌레몬과의 관계를 자기는 명령할 수 있는 사람, 빌레몬은 명령을 들어야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탁이 아닙니다. 16절에도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라고 명령하고, 17절에서도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 13절에서도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라고 내가 감옥에 있는 나를 섬길 사람은 당신 빌레몬이고, 당신은 그럴 의무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도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에게 빚졌다고 말하는데 바울이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금전적 경제적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적, 신앙적인 말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빌레몬은 바울에게 복음 빚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액이 상당한 재산적 손실을 끼치고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보다도 훨씬 크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누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 당당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곳,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을 영적인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종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해야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고 그 말씀에 당연하게 순종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권세가 있습니다. 권세를 달라 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달라 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받을 만한 사람에게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복은 주실만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믿음과 그런 인식,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좀 건방진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들이고 아버지 사이입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것은 다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 그런 확신이 있는 사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은 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하게 나에게 보내주실 것이고, 내가 필요하면 나는 당연하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15절에서는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라고 오네시모에 관한 것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 당신에게서 도망 간 것, 감옥에서 나를 돕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은 오네시모에 관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입니다. 참으로 멋진 하나님의 종과 교인들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은 자기가 어떤 말을 하든지 전부다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맘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0절) 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빌레몬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당신은 더 큰 것을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궁극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오네시모에 관한 일은 당연하게 순종하여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이 거래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과 여러분들이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을 여러분의 믿음의 아버지로, 하나님의 종들은 여러분들을 믿음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서로 믿음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런 부탁을 했는데 이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라는 편지자체가 그 결과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고 난 후에 편지를 들고 교회에 가서 모든 교우들이 있는 데서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네시모라는 저의 노예가 저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오네시모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감옥에 계시는 사도 바울님을 만나서 복음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금 감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바울님 옆에서 바울님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님이 이 모든 사정을 아시고 오네시모를 위해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그 편지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저는 바울님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즉시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것은 저의 영광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가 데리고 있는 다른 노예들을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바울님 말씀처럼 노예들을 이제는 노예가 아닌 형제로 맞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 빌레몬의 말을 들은 모든 교인들은 ‘아멘’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노예들을 자기 형제로 다 받아들이고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바울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편지는 한 교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또 멀리 있는 많은 교회에서 종이와 먹을 들고 와서 한 사람이 읽으면 그 편지를 받아쓴 후 사본을 만들어 자기 교회 돌아가서 모든 교우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빌레몬의 교회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데 우리도 빌레몬의 교회처럼 노예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이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가 해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개혁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고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입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위대한 종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당하기 위해서 안디옥에서 로마로 이송되는 도중에 에베소 교회로 편지를 발송했습니다. 그 편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그 편지 첫머리에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 지도자는 감독인데 그 감독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숙하고 성장하여 당시 기독교 중심도시인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한 악한 노예, 잡히면 처참하게 처형 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노예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이제는 무익한 종이 아니라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지만 이제는 자기 주인에게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도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는 하나님께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빌레몬서 1: 1~14 ═════════════════════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했습니다. 교인들은 이번에 오시는 목사님의 설교가 궁금했습니다. 첫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가 좋았습니다. 교우들은 다음 주 설교를 기대했습니다. 다음 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상하게도 지난 주 설교를 그대로 똑같이 했습니다. 교인들은 무슨 까닭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그 다음 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도 또 그 다음 주도 똑같은 설교를 계속해서 되풀이했습니다. 교인들이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내 설교를 듣고 다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좋아하기만 할 뿐 변화가 없습니다. 설교를 들었으면 변화가 있어야하는데 변화가 없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변화가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되풀이하려고 합니다.’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앞으로 두 주 동안 두어 달 전에 했던 설교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젊은이가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참으로 예쁜 젊은이였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에서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 라고 그 젊은이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울이 오네시모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인데 그것도 주인에게 상당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그 손실더미를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도리가 없기 때문에 도망친 노예가 지금 바울 옆에서 바울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민했습니다. 도망 나온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당시 로마법으로는 큰 죄였습니다. 또 남의 노예를 주인 허가 없이 데리고 있다는 자체가 큰 잘못인 것입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에게는 상당한 재산이었는데 남의 재산을 주인의 동의 없이 몰래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에 많이 걸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숨겨주는 이것 때문에 오네시모가 체포되면 처참하게 처형될 수 있습니다. 당시 법에 따르면 도망친 노예는 최악의 경우에 십자가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바울이 고민 고민하다 오네시모의 주인과 직접 해결해야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오네시모의 주인이 자기가 옛날에 복음을 전해준 빌레몬이라는 제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빌레몬에게 쓰게 된 것이고 이 편지는 ‘빌레몬서’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2절에 압비아 그리고 아킵보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고 아킵보는 아들로 빌레몬의 가족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설명할 때 수식어가 있습니다. ‘압비아’ 앞에는 ‘자매’라는 말이 있고 ‘아킵보’ 앞에는 ‘우리와 함께 병사된’ 이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자매’라는 말은 교회의 일꾼이라는 말이고 ‘우리와 함께 병사된’ 이라는 말은 충성된 기독교인이라는 말입니다.
1절 마지막부터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1-2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의 가족 이 세 사람은 다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이고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특히 2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의 예배당으로 제공했습니다. 당시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한다는 말은 한 두 시간 예배드리는 장소로만 제공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살기 어려웠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식사 때가 되어도 자기 돈으로 식사를 준비해오지 못했고 자기 능력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노예도 있었고 아주 힘들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과부들, 나그네들도 있었기 때문에 자기 집을 예배당으로 제공한다는 말은 예배드릴 공간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제공해야했습니다.
이 빌레몬을 생각하면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 라는 주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빌레몬은 그 어려운 일, 참으로 힘든 일, 정말로 귀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라도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 빌레몬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돈 벌어서 내 한 입, 기껏해야 내 주변의 몇 몇밖에 안 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 힘없고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그 사람들을 웃게 하고 한 평생 노래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그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노래하게 해주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인생을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 말씀에 ‘은쟁반에 금구슬’, ‘은쟁반에 금사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왕 이 세상 한 평생 살아가면서 돈이 많든 적든 간에 은쟁반에 금구슬, 금사과 같은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세월 다 지나갑니다. 많든 적든 가진 것 다 두고 갑니다. 그때 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빌레몬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또 나중에 주님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너야말로 은쟁반에 금구슬, 금사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꼭 부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은쟁반에 금구슬을 올려 놓은 사람, 은쟁반에 금사과를 올려놓은 것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복이고 여러분들에게 행복입니다. 여기서 부자라는 정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부자란 돈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자란 돈 많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일에 많은 돈을 쓰는 사람이라고 교회 밖에서도 이미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4절) 라고 자기가 기도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빌레몬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종은 별 것 아닙니다. 여러분 보기에도 그렇고 하나님의 종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더욱 별 것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에 의해서 기도드려지는 사람은 정말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제 말씀이 아니라 우리 주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대단한 사람이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섬기라고 천사를 보내십니다. 여러분을 섬기는 천사는 하나님을 만나서 여러분들에 관해서 보고합니다.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귀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귀한 사람이며 여러분에게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가 있으면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 그런 기도에 응답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천사들은 하나님께 ‘하나님, 이 사람의 기도는 들으셔야합니다. 이 사람의 소원은 들으셔야합니다. 이 사람을 거부하시면 안 됩니다.’ 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거부할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의 중보를 들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천사라는 하나님의 종들만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당신의 종을 보내십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람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천사의 말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 세우신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의 말, 기도도 듣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잘났든 못났든, 크든 작든 간에 그 종들의 기도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빌레몬이 하나님의 위대한 종 바울의 특별한 기도를 받는 까닭을 성경은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 번째, 빌레몬은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기는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힘을 다해서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은 정말로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고 더 서둘러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여러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힘쓰고 애쓰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힘을 쓰고 노력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때로 계산적일 수 있고 또 때로는 일시적이고 잠시로 그칠 수 있겠지만 여러분 속에 오신 예수님께서 힘 있게 역사하시게 되면 여러분들의 그 사랑은 잠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이해타산 없이 계산 없이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력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마음속에 계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힘있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6절은 빌레몬이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6절 맨 처음 ‘네 믿음의 교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빌레몬이 믿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잘했다는 말씀입니다. 빌레몬은 이 일을 잘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절약하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선하고 귀한 일을 하게 되면 도움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먼저 여러분이 행복합니다. 그 사람도 복을 받겠지만 여러분이 더 큰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돈이 많든 적든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받고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것은 여러분에게 돈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만 시늉하면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주 여러분들에게 더 복을 주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자칫 자기 얼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6절 중반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6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레몬은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은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 얼굴,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선, 하나님의 선, 교회의 선을 드러냈다고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 천사든지 사람 종이든지 간에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서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쁜 사람으로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종들은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각별하게 더 귀한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들, 천사들은 더욱 더 각별하게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천사들로부터 또 이 땅의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중보기도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그 모습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매일 빌레몬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빌레몬의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6절 마지막에서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빌레몬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이 빌레몬의 귀한 일을 통해서 교회란 이런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란 이런 분이구나, 그 하나님을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세상 사람들, 교회에 갓 들어온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도 저 사람이 섬기는, 저 사람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을 모시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빌레몬은 교회를 평안하게 했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7절)
세상은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삭막하고 어렵습니다.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재미가 없습니다. 평안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평안을 얻고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에게 빌레몬처럼 위로를 준다면,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갖게 해준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한 평생 지나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일들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제쳐두고 ‘이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았다, 내가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라고 틀림없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눈으로 똑똑하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진짜 곡식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참된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곡식은 평안하게 합니다.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이웃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가정을 평안하게 하고 교회를 평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반대입니다. 주변의 사람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힘들게 만들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7절에서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종이 빌레몬 때문에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잘 먹고 잘 살고 여러분의 후원을 받았을 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바른 일을 하고 선하게 살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실 때 하나님의 종들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이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기쁨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귀한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받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겁겠습니까? 이 일을 보아도 저 일을 보아도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선한 사람들은 점점 더 밀려나가고, 있는 것까지 빼앗겨 빈자로 가고, 빈자는 극빈자로 밀려가는 이런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우신지 모릅니다. 그런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생에 이보다 더 큰 영광이,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여러분들에게 힘을 얻고 기쁨을 얻고 위로를 얻는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여러분들로부터 받은 그 기쁨과 위로의 몇 십 배, 몇 백배를 더해주십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더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귀한 일을 더 하도록 만드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일을 부탁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불법적으로 와 있는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는 말을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2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무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속에는 오네시모가 지금까지는 불법적으로 와 있었기 때문에 돌려보내기는 하지만 이제는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오네시모를 다시 돌려보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바울에게 특별한 표현이 몇 개있습니다. 먼저 8절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라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부자 빌레몬과의 관계를 자기는 명령할 수 있는 사람, 빌레몬은 명령을 들어야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탁이 아닙니다. 16절에도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라고 명령하고, 17절에서도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 13절에서도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라고 내가 감옥에 있는 나를 섬길 사람은 당신 빌레몬이고, 당신은 그럴 의무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도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레몬에게 빚졌다고 말하는데 바울이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금전적 경제적 의미가 아닙니다. 복음적, 신앙적인 말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빌레몬은 바울에게 복음 빚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액이 상당한 재산적 손실을 끼치고 빌레몬에게서 도망간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보다도 훨씬 크다는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누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참 당당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곳, 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을 영적인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종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해야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고 그 말씀에 당연하게 순종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권세가 있습니다. 권세를 달라 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달라 한다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권세받을 만한 사람에게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고 복은 주실만한 사람에게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믿음과 그런 인식,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다 내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좀 건방진 이야기 같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들이고 아버지 사이입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것은 다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 그런 확신이 있는 사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은 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필요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하게 나에게 보내주실 것이고, 내가 필요하면 나는 당연하게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15절에서는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라고 오네시모에 관한 것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손해를 끼친 것, 당신에게서 도망 간 것, 감옥에서 나를 돕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당신은 오네시모에 관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입니다. 참으로 멋진 하나님의 종과 교인들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은 자기가 어떤 말을 하든지 전부다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확신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맘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0절) 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빌레몬 당신에게 기대하는 것, 당신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당신은 더 큰 것을 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궁극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22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오네시모에 관한 일은 당연하게 순종하여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이 거래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과 여러분들이 거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서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을 여러분의 믿음의 아버지로, 하나님의 종들은 여러분들을 믿음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서로 믿음으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런 부탁을 했는데 이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빌레몬서라는 편지자체가 그 결과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로부터 편지를 받고 난 후에 편지를 들고 교회에 가서 모든 교우들이 있는 데서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 오네시모라는 저의 노예가 저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오네시모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감옥에 계시는 사도 바울님을 만나서 복음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지금 감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바울님 옆에서 바울님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바울님이 이 모든 사정을 아시고 오네시모를 위해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그 편지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저는 바울님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즉시 노예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것은 저의 영광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가 데리고 있는 다른 노예들을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바울님 말씀처럼 노예들을 이제는 노예가 아닌 형제로 맞아들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 빌레몬의 말을 들은 모든 교인들은 ‘아멘’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노예들을 자기 형제로 다 받아들이고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바울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편지는 한 교회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또 멀리 있는 많은 교회에서 종이와 먹을 들고 와서 한 사람이 읽으면 그 편지를 받아쓴 후 사본을 만들어 자기 교회 돌아가서 모든 교우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이 교회들은, 빌레몬의 교회는 이렇게 했다고 하는데 우리도 빌레몬의 교회처럼 노예를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받아들이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가 해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개혁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고 기독교인들의 사회 개혁입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위대한 종 이그나티우스가 순교를 당하기 위해서 안디옥에서 로마로 이송되는 도중에 에베소 교회로 편지를 발송했습니다. 그 편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그 편지 첫머리에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 지도자는 감독인데 그 감독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이 일로 말미암아 성숙하고 성장하여 당시 기독교 중심도시인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 도망한 악한 노예, 잡히면 처참하게 처형 받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노예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이제는 무익한 종이 아니라 유익한 종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무익했지만 이제는 자기 주인에게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도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그 뿐만 아니라 오네시모는 하나님께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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